송창식의 나의 기타이야기를 들으며..
첫 사랑 얘기가 누구든 없지 않듯, 통기타를 좀 가까이 한 사람이라면 아마 첫 사랑 같은 기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이 있을 거라 본다.
기타를 마련하고, 또 기타를 배워가면서 경험하는 숱한 사연들에 대한 그것들.
1985년 1월초, 그러니까 고3 겨울방학 무렵으로, 졸업을 한달여 남짓 남기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내 앞으로 노란색 얇은 봉투의 편지 한통이 배달되어 왔다.
무엇일까 하며, 봉투를 개봉하니, 섬뜩한 내용의 독촉장아닌가.
여리디여린, 순진 그 자체 시골 학생이 받은 그 순간의 두려움과 공포, 무서움 등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불과 졸업을 한달여 남겨두고 손해배상 운운하며 허를 찌르듯, 언제까지 돈 갚을 것을 요구하는 최고장이 날아든 것이다. 보낸 곳은 그 당시 유명했던 S영어사 부산영업본부.
그것을 받아들고 부모님께 말도 못하고 혼자 몇날며칠을 끙끙앓으며 어떻게 해야할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얘긴즉 그렇다.
고1 겨울방학 때 영어과목 담당이던 우리반 담임선생님께서 "잘 만들어진 영어회화테이프가 나왔다"면서 시골이라 외국어학원을 못다니는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며 구입을 추천(?)하신 거다.
반학생 1/3가량이 구입을 했고, 나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 당시 구입가가 12만원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여유로웠던 교회 목사 아들 한명을 제외한 모두가 할부로 구입을 하게 됐다. 매월 5000원씩 납입하는 조건으로.
하루벌어 하루사시는 가난한 부모님께 도저히 사치 같은 언감생심 영어회화테이프, 그것도 할부로 구입했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다가오는 할부금날짜. 그건 지옥이었다.
이런저런 참고서구입 등의 명목으로 처음 몇달은 버티었는데, 더 이상은 한계였다. 포기, 나홀로 모라토리엄 선언.
그런데, 웬일. 월부금납입 독촉이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아무일 없는듯 몇 달이 지나가고, 지옥 같은 영어테이프구입일은 내게서 잊혀지고 말았다.
영어테이프는 구입한 박스 그대로 책장위에 놓인 채로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고.
그러다 졸업 때가 다 되어 두려움에 치를 떨게 하는 추상 같은 최고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해 겨울밤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더랬다. 그러다 한날에 의기소침한 채 영어테이프 박스를 꺼내 들고 영어교재를 한장 한장 넘겨 봤다. 도대체 이게 뭔데 사람을 지옥에 빠트리나 하면서.
그러다 발견한 산삼, 아니 한줄기 희망. 영어교재의 치명적 결함을 발견해 낸 것이다.
교재 중간 몇 페이지가 제본이 잘못되었는지 순서가 뒤죽박죽인 것이다. 지금껏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여하튼 바로 다음날 아침일찍 의기양양한 채 부산행 버스에 올랐다. 부모님께 사정을 얘기하고 혹시나 모르니 그동안 못낸 미납할부금을 얻어갖고서.
물어물어 찾아간 S영어사 부산영업본부. 그 당시 부산시 초량동에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담당자를 찾으니, 친절하게 맞는다.
말을 꺼내면 내가 질 것 같아 '최대한 말을 안해야지'하고 건물입구에 들어서면서 마음먹었다.
담당자에게 우선 내가 받았던 최고장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잘못된 영어교재와 함께 구입한 그대로의 영어테이프 박스를 담당자 책상에 툭 올려놓았다.
"잘 한번 살펴보세요"하고선.
무슨 문제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박스를 열어 이리저리 살핀다.
"교재 중간 잘 한번 보세요."
"... ."
"손해배상은 제가 청구해야겠네요? 이렇게 교재 만들어 팔아놓고 돈 갚으라 독촉장보내고..."하고 언성을 약간 높였더니, 담당자는 주위를 살짝 돌아보더니 쥐구멍 찾기정도는 아니나, 자신의 상사를 의식해서인지 조용한 해결을 부탁했다.
첫 새벽에 하동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 더욱 곤혹스러워한다.
난 그날 그동안 몇 차례 납입한 대금 모두 돌려받고, 버스비까지 받아냈다.
그리고 그 건물을 나와 시외버스터미널로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도중, 길가 기타가게에 진열된 내 시선을 단숨에 강탈해버린 세련된 느낌의 하얀색의 야마하 통기타.
무엇에 홀린듯 앞뒤 재지 않고 즉석에서 구입하고 말았다.
서비스로 준 기타교재와 함께 기타를 둘러메고 고향집 마당에 들어서는데, 나를 내쫒을 듯한 어머니의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의 모습.
작년에 KBS2 주말드라마 '황금빛내인생'이 고공 시청률을 기록하며 장안의 화제였다. 나 역시 그 드라마 팬이었는데, 극중 주인공 서지안의 아버지 역으로 나오는 천호진의 기타배우는 장면이 나오면 왠지 뭉클한 무언가가 가슴을 에이게 만들었다.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 하다, 어떤 시점에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무조건적, 희생적 삶의 무의미와 덧없음을 깨닫고, 상상암에 걸린 채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면서 젊었을 때의 꿈이었던 클래식 기타를 배우며 행복해 하는 모습이 극중에 그려진다.
어쩌면, 그런, 그런..
데자뷰 같다고 할까.
기타를 집에 가지고 온지 한달쯤 되었을까.
아버지께서 내가 구석에 세워놓은 기타의 기타줄을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신기한 듯 퉁기고 긁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의 그 모습을 뚫린 창호지문구멍을 통해 숨어서 난 한참을 지켜보았다.
어쩌면, 아버지에게 젊은 날 동경했던 꿈중에 기타도 있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극중 천호진처럼.
올해로 아버지 돌아가신지 6년째이다. 어떤 모습으로 나루터를 내려다보고 계실까. 그립다.
- 달빛 머금는 나루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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