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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 정담(情談)

하모니카 추억

그 시절이 그립다.

내가 하모니카를 처음 가져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객지로 돈을 벌러 나간 큰누나가 어린이 날 선물로 사준 하모니카를 가지면서였다.

 

그 당시 실물로 접해본 악기는, 기껏해야 음이 한두 개쯤 틀린 채 발판이 삐걱거리는 학교의 풍금이나 잇자국이 선명한 플라스틱 리코오드가 전부였다. 하모니카는 '감히'라는 말을 앞세워야 할 만큼 나에게는 부시맨의 콜라병처럼 문명, 그런 '문명의 악기'였다.

 

하모니카로 처음 배운 곡은, 초등학교 5학년 음악 책에 나오는 '과꽃'이었다. 그 노래는 멜로디가 좌우로 왔다갔다하여 하모니카를 부는 게 제법 쉬웠다. 하모니카의 계명을 제대로 익히지도 못 한 채 불기 시작한 나는 주로 쉬운 앞부분만 불다말고 그랬다. 그러기를 며칠, 어설프지만 '과꽃' 전 마디를 하모니카로 불게 되었을 때는 하늘로 두둥실 날아오를 것 같았다.

 

농사일로 늘 바쁘신 부모님을 대신해 소먹이는 일은 내 몫이었다. 학교를 파(罷)하자마자 엇걸음인 채 배고파 서두는 소를 앞세우고 곧장 방죽으로 나갔다. 오른 손엔 소고삐, 왼 손엔 언제나 하모니카를 쥐고서. 앙칼진 매미 울음에, 지친 버드나무가 듬성듬성 서있는, 들녘을 가로지르면, 섬진강 줄기를 따라서 길게 축재된 방죽이 있다. 그 곳에 가면, 멀리 남해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들의 경적소리도 들렸고, 물속에서 재첩 잡는 아낙들도 보였다. 내 소중한 어릴 적 추억이 깃든 그 곳에서, 1학년 때부터 배웠던 노래를 불기 시작해 땅거미 질 무렵까지 하모니카를 불면서 시간을 보냈다.

 

같이 소 먹이러 간 동네 꼬마들이 원하는 곡을 다 불어주고 그랬다.
한 번은, 하모니카를 부는 데에 몰두하여, 제방을 관리하는 면사무소 직원이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 소를 방목하고 풀 먹이는 것을 단속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혼쭐나기도 했고, 입이 헤픈 소가 이삭이 한창 피고 있는 벼를 뜯어먹어서 주인한테 야단을 듣기도 했다.

 

몸이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난, 나가서 뛰어 노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좋았다. 하모니카와 빨리 친숙해진 데는 아마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변함없이 하모니카랑 친했다.
비단결 같은 긴 머릿결과 피아노건반 위 손놀림처럼 경쾌한 발걸음이 인상 깊은 음악 선생님은 큰누나와 많이 닮아서 정이 가기도 했다.

 

한 번은 음악 시험 때, 시험은 하모니카와 리코오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미국 민요작가 포스트의 '기러기'를 연주하는 거였다. 학년 전체에서 하모니카를 선택한 학생은 많았지만, 끝까지 연주를 제대로 한 학생은 몇 명없었다. 또 언젠가는, 숙제로 16마디로 된 4분의 4박자 곡을 작곡하는 거였는데, 하모니카를 불어가며 어렵사리 해간 숙제를 선생님이 보고 놀라며 나의 어깨를 다독거리기도 했다.

 

그 즐거운 기억도 잠시,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를 가신다는 얘기와 함께 하모니카에 대한 사랑은 내게서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 후, 하모니카에 대한 어떤 미련이랄까. 가끔씩 책상 서랍에 덩그렇게 놓인 하모니카를 보고 머리를 긁적이며 멈칫거리는 손이 가려는 의지를 못내 꺾도록 한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3 때 앓은 늑막염이었다.

 

가슴에 물이 차오를 땐, 숨이 가쁘고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다. 바람을 불고 들이마시는 하모니카 연주에는 치명적이었다. 워낙 몸이 허약했던 터라 병이 완쾌되는 듯싶다가 재발을 거듭해 결국엔 학교를 오랫동안 쉬기까지 하였다. 졸업 무렵엔, 모자라는 수업일수 때문에 애가 탔었다.

 

그렇게 하모니카는 기억 속에서 잊어지는가 싶었다. 그런데 한두 달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감 넘치는 하모니카 연주를 무심결에 듣고는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바로 그 다음날, 종로에 있는 악기상가엘 갔다. 그리고는 켜켜이 쌓여버린 과거 시간더미 속에 하마터면 영원히 파묻힐 뻔한 하모니카를 찾아냈다.

 

오늘, 모처럼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다가 책상 서랍 속에 들어있는 하모니카를 보았다. 유리 진열대 위의 스텐리스 그릇처럼 윤나는 하모니카를 손때 묻을까 조심스럽게 꺼내서 입에 대보니 감개무량하다. 나도 모르게 '목련꽃 그늘 아래서…'로 시작되는 사월의 노래, 사공의 노래, 봄처녀, 그네, 고향생각 등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노래들과 아! 목동아, 오빠생각, 보리수, 반달, 섬 집 아이 등 서정적인 노래들이 입가에 샘솟는 작은 미소와 함께 절로 흥얼거려진다.

 

문득, 50대 중반에 접어든 큰누나가 하모니카에 얽힌 추억 속에서 양지바른 봄 뜨락에 피워 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아리따운 새색시 모습으로 아련히 떠오른다. 보고 싶다.

 

- 달빛 머금는 나루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