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장희 “울릉도에서 더덕농사 짓습니다” |
입력: 2008년 02월 28일 09:34:36 |
ㆍ5년전부터 농사꾼 변신 ‘거침없는 인생’
그의 행동반경을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지금쯤 여기 있겠지라고 생각하면 저기 있고, 이젠 이걸 하겠지라고 짐작하는 순간 저걸 하고 있다고 연락이 온다. 서울에서 헤어진 지 며칠 만에 지구 저편에서 전화를 걸어 “여기 알래스카인데 노을지는 풍경이 죽여, 헛헛헛” 하고 특유의 너털웃음 소리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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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코리아 사장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이장희씨 모습. 수염이 없어진 것 외엔 별 변함이 없지만 이장희씨는 극구 사진찍기를 거부했다. | 지난 1월에 지인들과 자신의 환갑기념으로 칠레, 아르헨티나 등을 경유하는 남극 유람선 여행을 하며 e메일로 남극여행기를 보내더니 2월초엔 충북 괴산의 농업학교에 입소해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환경친화 농업에 대한 교육과 농사철학을 공부했단다. 그리고 50년 만에 울릉도에 가장 눈이 많이 내렸다는 정월 대보름날, 기르던 개 라코가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는 담백하면서도 애틋한 소식을 전해왔다.
1970년대 청년문화의 상징인 가수 이장희씨는 5년 전부터 울릉도에서 더덕농사를 짓고 있다. 특유의 콧수염과 장발을 모두 밀어버려 과거의 ‘청년 이장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낮으면서도 힘있는 목소리에 너털웃음은 변하지 않았다. 가수, 작사작곡가, 음반제작자, 패션매장 주인, 카페, 라디오방송국 사장, 여행사 대표, 그리고 농부…. 그 숱한 직업도 규정하기 힘든 남자, 이장희씨는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 “크루즈를 타봐야지” 등 많은 이들이 꾸는 꿈들을 일상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란 표어를 벽에 붙여 놓고 밤늦도록 공부한다며 책을 펴놔도 심란하기만 했던 청소년 시절, 라디오를 틀면 ‘In the Year of 2525’란 시그널 음악과 함께 들려오던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
7080세대 가운데 이장희와 그 노래의 추억에서 자유로운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그 애와 나랑은’ ‘자정이 훨씬 넘었네’…. 이런 히트곡들을 모두 직접 지어 불렀다. 정미조의 ‘휘파람을 부세요’, 김세환의 ‘좋은 걸 어떡해’, 록그룹 ‘사랑과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같은 노래들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소풍 가서 남학생들이 온몸을 훑으며 부르던 CM송 ‘나만이 알고 있는 사랑의 비너스’도 그가 만들었다.
“1973년 언젠가 이장희의 ‘그건 너’가 소리소문 없이 몰고 온 파장을 실감있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건 김민기나 한대수의 노래처럼 ‘지성의 사색’이란 여과도 필요 없이 그냥 몸에 꽂히는 효과였다. 구어체의 생생한 가사, 필요할 때마다 터져주는 후렴구, 음치 같지만 강렬한 가창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가 흐른 뒤의 맥빠진 음악평론식 해석일 뿐이다.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기운을 겉치레 없이 순전히 음악으로만 표현한 것은 이장희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이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중문화 평론가 신현준씨가 이렇게 묘사했듯 그의 노래와 노랫말은 충격이었다.
남학생들은 그가 거친 듯한 음색으로 부르는 ‘그건 너’와 ‘한잔의 추억’을 열창하며 스트레스를 풀었고, 여학생들은 최인호씨가 아름다운 노랫말을 지어준 토크송 ‘겨울아이’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달콤한 목소리에 가슴 설레며 사춘기를 통과했다. 그 떨림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은 벌써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40~50대 중년으로 고혈압과 퇴직과 황혼이혼의 불안에 시달리는데 그 떨림을 선물한 주인공 이장희씨는 진갑의 나이에도 청년기를 유지한다. 그는 그 비결을 “나를 위해 살고 늘 모험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동기는 한편의 영화와 몇권의 책이었다.
마산이 고향인 그는 4살 때 천자문을 배워 신동소리를 들었다. 서울로 올라와 창신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다음에 톱스타가 될 문희, 윤여정 등이 같은 학년 여학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드라큘라’란 영화를 보고 그는 한달 동안 잠을 못잤다. 죽음의 공포보다 죽기 전에 어떻게 살까 하는 깨우침이었다.
“드라큘라에 물려 죽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 나도 죽겠지, 그럼 일회뿐인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래, 나는 나 살고 싶은 대로 살자.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내 자유의지대로 살자….”
겨우 11살 된 소년에겐 너무 심오한 인생의 의미를 그는 드라큘라란 영화 덕분에 깨우쳤고 그후 그의 삶은 단 한번도 타인의 의지나 권유에 의해 조종되지 않았다. 학교도, 직업도, 결혼도, 여행지도 모두 그 자신의 결정에만 따랐다.
서울중 2학년 때 삼촌 친구인 조영남씨가 집에 놀러와 기타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고 그는 넋이 나갔다. 음악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를 듣고 조영남 아저씨는 “너같은 음치는 절대 노래하면 안돼”라고 했다. ‘화개장터’ 등 ‘빈약한’ 히트곡을 갖고 있는 조씨는 숱한 히트곡과 더불어 ‘70년대 음악계의 신화’로 불리는 이장희씨에 대해 “내가 유일하게 가치를 못 알아본 인재”라면서도 “하지만 그땐 정말 노래를 못불렀다”고 기억한다.
공부를 통 안하다가 시험에 임박해 교과서 몇번 읽어보고 서울고, 연세대 생물학과에 들어가 어머니를 안심시킨 것도 잠깐, 그는 전공이 맞지 않아 대학을 그만두고 음악을 시작했다. 홍대생이던 기타리스트 강근식을 만나 듀엣을 결성했고 음악다방 ‘쎄시봉’에서 윤형주, 신중현, 서유석, 송창식, 김세환, 김민기, 김도향 등과 교우했다.
남의 노래만 부르다가 71년, 인기 DJ 이종환씨의 권유로 1집 앨범 ‘겨울이야기’를 냈다. 72년 2집 앨범에 수록된 ‘그애와 나랑은’ ‘그 여인 그 표정’ 등이 히트했고 73년 1월1일 자정에 ‘0시의 다이얼’ DJ를 맡으면서 이장희는 완전히 스타가 됐다. 74년 영화 ‘별들의 고향’에 쓰인 노래,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난 아직 몰라요’ 등을 담은 앨범은 한국가요계를 평정했다. 74년엔 3년간 열애끝에 첫사랑과 결혼했다. 그의 삶은 그저 반짝거리기만 했다.
하지만 햇살이 영원할 수는 없는 법. 75년 1차 가요정화운동 때 ‘그건 너’ ‘한잔의 추억’ ‘불꺼진 창’ 등 히트곡 대부분이 금지곡 목록에 올랐다. ‘그건 너’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고, ‘불꺼진 창’은 창안에 남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가사 때문에 불륜을 그렸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금지됐다. 6개월 후인 12월3일에는 인기연예인 80여명과 함께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철창신세를 졌고 노래도 접었다. 친구 권유로 ‘반도패션’ 지점을 운영하며 옷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노래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작곡과 음반 제작을 시작했다. 78년 그의 손에서 탄생한 록그룹 ‘사랑과평화’ 1, 2집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김수철, 김현식 같은 신인가수들도 발굴했다. 하지만 ‘대마초 가수’란 낙인에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규제가 심한 무렵이라 그 좋아하는 음악 세계 역시 답답하기만 해 탈출을 꿈꾸다 기회를 맞았다.
80년, 김태화가 부른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태평양가요제에 초청받은 것. 작곡가 김도향, 가수 김태화와 함께 제작자 신분으로 캐나다에 들른 길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여행온 소설가 최인호를 만났다. 고교 선배이자 친구형인 그와 함께 미국 자동차여행을 떠났다. 20대엔 청바지와 통기타, 청년문화의 상징이던 두 사람은 33살과 35살 가을에 중고차를 한대 사서 미국 횡단을 했다. LA를 출발해 캘리포니아주, 애리조나주의 그랜드 캐니언, 유타주의 자이언국립공원·브라이스 캐니언·모뉴먼트 밸리 등을 두 남자는 자동차로 달렸다. 황홀하게 아름다운 숲이 보이기도 하고 시속 120㎞, 140㎞로 달려도 서너시간 동안 차 한대 만나기 힘든 곳도 많았다.
그가 그후 200번 넘게 다녀온 그의 영혼의 땅은 캘리포니아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데스밸리(Death valley) 국립공원이다. LA에서 차로 6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데스밸리는 죽음의 계곡. 1949년 서부 금광을 찾아 떠났던 20개 개척팀 300여명이 120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와 마시면 죽는 소금물 때문에 모두 죽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오묘한 빛깔의 바위산, 온몸을 서걱서걱하게 만드는 모래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에 누으면 금방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랗고 반짝이는 별들은 그후로도 그를 달려가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그 여행 후 또다른 문을 열었다. 최인호씨는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쓴 단편소설 ‘깊고 푸른 밤’으로 82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죽음의 계곡’, 아니 미국의 광활한 대자연의 포로가 된 그는 미국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90년대, 이장희씨의 근황이 궁금할 즈음, 그는 갑자기 미국의 영웅이 되어 나타났다. 미국 취업비자를 얻기 위해 한인 라디오에 DJ로 일하던 그는 88년 미디어 사업이 유망하다고 판단, 자본과 인력이 적게 들고 나름의 노하우도 갖고 있는 라디오를 선택했다. 이전에 있던 교민방송은 미리 신청을 해야만 들을 수 있었는데, 그는 스튜디오를 빌리고 AM주파수를 사 LA지역이면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했다. 교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교민사회의 대소사, 온갖 민원과 문의와 토론과 오락, 나아가서는 교민의 의견까지 라디오코리아로 모아졌다. 최근 화제의 주인공인 에리카 김이 법률상담 코너를 진행했고 ‘주간경향’의 박무일 기자가 서울에서 국제전화로 고향소식을 전해 인기를 모았다.
92년, 미주한인 이민역사상 최대 수난이라고 알려진 LA폭동 기간중 ‘라디오코리아’는 일체의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구조활동을 하며 상황실·대피소·자위대 본부역할을 했다. 당시 부시 전 대통령이 직접 라디오코리아 스튜디오를 방문해 동포들에게 격려와 담화문을 발표했고 미 대통령 공로장을 수여했다.
92년 라디오코리아의 활약상을 전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던 그는 검은 정장수트 차림의 CEO 모습이 너무 잘 어울렸다. 진지한 태도와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미국 현지 상황을 전해준 그가 ‘그건 너’의 주인공이란 걸 알 수 있는 것은 콧수염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또 우리들의 예측을 보기좋게 배신했다. 2003년 12월31일로 라디오코리아를 물러난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전파를 임대한 중국계 방송국이 라디오코리아가 성공하자 전파료를 2배 이상 올려달라고 요구했기 때문.
“월 18만달러의 전파료를 35만달러로 올려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더군요. 그들의 치사한 요구를 들어주기 싫었어요.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늙기 전에 은퇴하고 싶어서 순식간에 접었죠. 원래 50세가 되면 은퇴해서 여행만 하고 살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진 거죠. 그때 또 발목이 잡히면 도저히 일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아 핑계삼아 순식간에 문을 닫았습니다.”
돈도 많이 벌어봤고, 음악이건 사업이건 손을 대면 성공했다. 하지만 실패도 많았다. 대마초 가수로 쫓기듯 조국을 떠나야 했고, 결혼도 파경에 이르렀다. 55세가 되었을 때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난 뭘 할 때 가장 가슴이 뛰고 황홀한가. 여자와 와인 마시며 대화를 나눌 때? 섹스나 마약? 아니었다. 그의 맥박이 빨라지고 피가 뜨겁게 끓는 열기가 느껴질 때는 대자연 속에 있을 때였다.
그후 그는 전세계를 여행했다. 미국 전역은 물론 아마존 정글, 남태평양의 작은 섬들, 유럽의 여러 나라, 중국과 일본 등을 모두 섭렵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타고 요세미티 국립공원까지 이어지는 존무어 트레일 코스는 3번이나 다녀왔는데 배낭에 들어있는 음식물 냄새를 맡고 찾아와 배낭을 훔친 곰을 만났다는 말을 마치 동네 골목에서 강아지를 만났다는 이야기처럼 즐겁고 담담하게 전한다. 언제 야생동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곳, 대체 언제 처음 생겼는지 모를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곳, 그저 모래소리만 들리는 막막한 사막 한 가운데서 그는 완벽한 자유를 만끽하고 가장 진실하게 죽음의 공포와 마주하며, 그래도 매순간 황홀한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낀단다.
지난 1월엔 지난해 하지 못한 환갑잔치를 겸해 친구들과 함께 남극 크루즈여행을 했다. 이젠 자연의 위대함만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했단다. 남극 여행을 하며 남극을 발견한 모험가들의 자료를 찾고 그 빙하뿐인 남극대륙 횡단에 성공한 섀클턴의 이야기를 친지들에게 e메일로 전했다.
서울에서, 혹은 LA에서 그가 배에서 쓴 편지를 읽는 이들은 부러움과 대견함과 뿌듯한 마음이 교차한다고 한다. 나는 왜 다람쥐 쳇바퀴처럼 살면서 단 하루도 나를 위한 시간을 쓰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이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꿈도 희망도 없이 늙어가야 할까, 그래도 내 친구 장희는 용감무쌍하게 자기 의지대로 자기 마음대로 멋진 노후를 즐기지 않는가란 생각들….
한국을 떠나 전세계를 돌고돌던 그가 발견한 천국은 울릉도다. 12년전 친구와 함께 울릉도를 찾았다가 절벽에서 바다로 안개를 뿜으며 낙하하는 폭포, 태고의 신비를 느끼게 해주는 바위, 그리고 가슴이 시원해지는 공기에 반했다. 몇번을 드나들다 5년 전엔가 집을 마련했다. 그리곤 울릉도에서 가장 어울리는 더덕농사를 짓는다. 올해는 8개월 정도 울릉도에 머물 예정이다. 친구들은 그가 ‘수시로 찾아오는 친구들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러 머나먼 섬 울릉도로 거주지를 옮겼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가 더덕농사꾼으로 변해 가장 충격을 받았으면서 가장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선배 조영남씨다. 3년전,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쓴 친일선언’이란 책과 발언으로 1년 반 이상 활동을 중지해야 했던 그는 프랑스 파리건, 미국 뉴욕이건 무조건 떠나려고 했다. 어딘가 자신이 오해받지 않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있을 것 같아 장소를 궁리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도 없이 이장희씨가 나타나 던진 말에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았단다.
“형, 이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어, 천국은 없다고. 나도 울릉도가 너무 좋아 울릉천국이라고 부르지만 더덕농사를 짓다보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아. 그렇게 온몸이 고통스러운데 무슨 천국이야!”
하지만 이장희씨는 지금도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건 아름다운 풍경이나 근사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 아직도 숨어 있는 소년, 모험과 열정으로 가득찬 소년이 감탄사가 나오는 곳이 바로 천국이다. 황량한 사막에서 발견하는 신기루, 죽음의 공포와 마주할 때만 새롭게 솟아오르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 그에겐 유토피아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의 뿌리를 더 정확히 알고싶어 성경도 읽고 버트란드 러셀의 ‘서양철학의 역사’나 하이데거의 철학책을 읽는다.
울릉도 울릉읍 북면 현포리의 더덕밭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철학책을 읽는 61세의 남자. 자연에 대한 호기심, 이웃에 대한 배려, 그리고 모든 것을 자유의지로 결정한다는 그는 현자의 표정을 가진 영원한 소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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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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